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페르디난트 (문단 편집) === 결혼, 그리고 황실과의 갈등 === 황태자가 된 페르디난트는 후계를 위해 결혼 중매를 받는데, 이상하게도 동생 오토[*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독일 제국]] [[작센 왕국]]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와 결혼했다. 이후 그들의 장남인 카를 대공이 [[카를 1세]]로 즉위한다.](1865~1906)와는 달리 중매를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분가인 합스부르크테셴 가문의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프리드리히 대공]][* [[나폴레옹 전쟁]] 때의 명장 [[카를 루트비히|카를 대공]]의 손자이자 [[테셴 공국]]의 공작. 당대의 [[스페인 왕정 복고|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와 [[바이에른 왕국|바이에른]]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외삼촌.]의 집을 자주 방문해서, 프리드리히 대공의 아내인 이자벨라 대공비는 8명이나 되는 자신의 딸들 중 한명이 페르디난트의 아내가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런데 1898년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 대공의 딸들이 아니라 그들의 [[시녀]]에 불과한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를 아내로 선택했다. 당연히 황실은 뒤집어졌고, 차기 황후가 될 여자가 겨우 중류 귀족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조피는 백작의 딸이고 귀족들 중에서도 먹고 들어가는 명문 출신이라 엄연한 [[상류층]]이나, 근세/근대 유럽의 귀천상혼-동등결혼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통치가문' 출신인지의 여부이다.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 자신의 영지(독립된 영토)를 통치하는 '군주'와 그러한 군주의 신하인 귀족은 서로 다른 신분으로 여겨졌던 것. 예시를 들면, 황가와 백작 가문의 결혼이라도 백작 쪽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같이 독립된 영토를 통치하는 가문이라면 격이 충분히 맞는다고 판단되어 귀천상혼이 아닌 동등결혼으로 인정받는다. 반면에 조피는 보헤미아계 백작 가문의 4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가 전통적으로 통혼해오던 가톨릭 명문 왕가 출신도, 하다 못해 [[슈탄데스헤어]][*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국들의 지배 가문으로 군림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통치권을 잃은 귀족가문들을 의미한다. 원래 통치가문들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지위를 일부 인정했다.] 출신도 아닌 일반 귀족 조피와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와의 결혼은 명백히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었다. 이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당시 시대상 동서를 불문한 어느 나라의 왕실이라도 무조건 반대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와의 결혼을 고집했고,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사이에는 극심한 반목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귀천상혼]]을 이유로 그의 계승권을 박탈할 수도 있었으나[* 실제로 귀천상혼으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는 사례는 왕왕 존재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엘리자베트]]의 큰오빠 또한 귀천상혼을 이유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따라서 그 작위는 엘리자베트의 남동생이 이었다.][*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제위권이 없다.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군주에게는 매우 심각한 결격사유.] 이미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여론이 뒤숭숭한 마당에 또 다른 제위 계승자가 계승권을 박탈당한다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여론의 비난이 거세질 것을 우려하여 결국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조피는 황제가 수여한 호엔베르크 여공작이라는 타이틀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의 두 아들과 딸은 황족 취급을 받지 못해 제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조피는 결코 공식 석상에서 황태자와 마주할 수 없었으며,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먼 대공녀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야 했다. 명색이 황태자의 결혼식인데도 황제는 물론 황실 인사들은 전부 불참하고, 유일하게 결혼에 찬성했던 계모 [[마리아 테레자|마리 테레제]]와 그녀의 딸 2명만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유럽 왕족 사회에서 이는 왕족의 정부와 그 자손들에게 대하는 대우로 당시 이들이 황실 내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를 자신의 아내이자 황태자비로서 당당히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를 바랐고, 1914년 사라예보 방문 때 아내를 대동한 것도 아내의 정치적 위신을 세워주고자 한 배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만 놓고 보면 최악으로 끝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